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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표 자동차 회사의 시작과 성공, 그리고 실패에 관한 모든 것(1)

현대건설 사옥에서 더부살이로 출발

1967년 12월 29일. 현대자동차의 공식 시작일이다. 이듬해 봄, 입사면접을 위해 현대차를 찾은 한 사회초년병은 당시 사무실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서울 무교동 현대건설 사옥 2층에 들어섰다. 직원 10여 명 사이에서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책상에 걸터앉은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가 바로, 신생기업 현대자동차를 이끄는 정세영 사장이었다.”

 

정세영 사장

 

이날 면접형식의 대담을 마친 뒤 초스피드로 합격을 결정 짓고 정세영 사장과 악수 나눈 젊은이가 훗날 현대차 부회장까지 역임한 박병재다. 그는 2012년 펴낸 책 <뉴 브릴리언트 컴퍼니>를 통해 당시 입사면접을 위해 찾은 현대자동차 사무실의 첫 인상을 위와 같이 소개했다. 그의 회상처럼, 현대자동차는 현대건설 사옥에서 ‘더부살이’하며 시작을 일궜다.

정세영은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의 동생이다. 1928년 강원도 통천군에서 태어나 신문기자, 통역관 등으로 활동하다 1957년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1967년 현대자동차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고, 1987~1994년 현대그룹 및 현대자동차 회장을 역임했다. 1974년 포니를 개발하고 수출하면서 ‘포니 정’이란 별명을 얻었고 지난 2005년,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주영 회장

 

현대그룹의 자동차 사업 진출은 필연적이었다. 정주영은 1940년대 초 ‘아도서비스(‘Art Service’의 일본식 발음)’란 자동차 정비공장을 인수해 1943년까지 운영했다. 잠시 운수업도 경험했고, 1946년엔 서울 명보극장 부근에 ‘현대자동차공업사’란 정비공장을 차렸다. 여기서 번 돈으로 현대토건을 세웠고, 1950년 두 회사를 합쳐 현대건설을 설립한다.

 

포드와 기술제휴로 자동차 사업 진출

1967년 4월, 현대건설 상무로 재직하며 미국 워싱턴 출장 중이던 정세영은 맏형, 정주영의 급한 연락을 받는다. “포드가 한국 진출을 모색 중이니 접촉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정세영은 곧장 디트로이트 디어본의 포드 본사를 찾아 담당자와 만났다. 포드는 현대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에서 추가 협상을 이어갔다. 포드와의 제휴를 점차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현대 포드 20M

 

현대는 협상 타결 전 정부에 ‘자동차 생산공장 건설허가 신청서’와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 1967년 12월 27일, 정부의 승인이 떨어졌다. 이틀 후 현대차 사업자등록증이 나왔다. 이날이 공식 창립일이다. 정부는 조건을 걸었다. 1968년 5월까지 포드와 제휴 하에 공장 세울 구체적 요건을 갖춰야 했다. 1968년 2월 23일, 현대차는 포드와 조립계약을 맺었다.

 

울산공장

 

1968년 3월, 현대차는 곧바로 공장부지 선정에 나섰다. 울산이 유력했다. 1962년 공업도시로 선포되고 시로 승격한 데다 항구를 끼고 있어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이후락의 도움도 영향을 미쳤다. 정세영은 자서전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를 통해 “이후락이 자신의 고향에 자동차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안팎으로 힘썼다”고 밝힌 바 있다.

 

울산공장

 

현대차는 공장 건설과 동시에 인재확보에 나섰다. 현대건설 입사성적이 우수한 직원들을 우선적으로 투입했다. 신입 및 경력직도 뽑았다. 박병재 전 부회장도 이때 현대차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만 해도 집에 냉장고와 TV 가진 직원이 거의 없었다. 정주영은 직원들을 모아놓고 강조했다. “앞으론 누구나 가전을 한 대씩 갖는 세상이 온다. 내가 그렇게 해주겠다!”

 

울산공장

 

첫 생산차종은 유럽 포드의 코티나

1960년대 한국 자동차 산업은 대략적으로 나눈 부품을 수입해 조립하는 ‘SKD(Semi Knock Down)’를 갓 벗어나던 시점이었다. 미국의 GM과 포드가 한국 진출을 모색하던 즈음이기도 했다. 두 회사의 스타일은 무척 달랐다. GM은 자본과 경영참여를 원했다. 반면 포드는 새로운 자회사 세우는 방식을 선호했다. 현대차가 포드와 손을 잡은 배경이었다.

그런데 미국 포드엔 한국 실정에 맞는 소형차가 없었다. 따라서 영국 포드의 ‘코티나(Cortina)’를 주력차종으로 결정했다. 영국에서 1966년 10월 출시해 이듬해 초부터 판매 2위에 성큼 오른 인기 차종이었다. 쿠페와 왜건 등 다양한 버전이 있었는데, 국내엔 2세대 세단을 먼저 들여왔다. 길이×너비×높이는 4,256×1,389×1,648㎜, 무게는 906㎏이었다.

 

코티나

 

정세영은 저서를 통해 당시 현대차 공장의 풍경을 자세히 설명했다. 5개 라인, 13개의 파트로 나눠 운영했는데, 포드 기술자의 자문에 따라 실습을 거듭했다. 1968년 11월 1일, 드디어 코티나 시작차를 생산했다. 그는 당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첫 차가 나오는 순간, 과연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 초조한 마음뿐이었다. 다행히 부드럽게 시동이 걸렸다.”

막상 코티나가 생산라인에서 굴러 나오기 시작하자 포드 관계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애당초 포드는 한국의 열악한 환경과 조건을 감안할 때 6개월 내 공장 건설이 불가능하다고 장담했다. “그런데 계획대로 일정을 맞춰 진짜로 만들기 시작하자 그들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현대차를 다시 보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정세영의 회상이다.

 

품질문제로 혹독한 신고식 치르고

데뷔 초반, 코티나는 승승장구했다. 판매를 시작한지 1년 만에 현대차는 5,000대의 코티나를 생산했다. 여기서 10억 원의 순익을 올렸다. 당시 최대 라이벌은 신진자동차가 토요타와 기술제휴로 만들던 코로나였다. 1968년 만해도 연간 1만 대 넘게 팔았는데, 코로나가 등장하면서 1969년엔 9,000여 대로 뚝 떨어졌다. 영국차가 일본차의 콧대를 꺾은 셈이다.

 

코티나 생산공장

 

1969년 9월 14일 저녁, 태풍 사라호가 몰고 온 비가 울산 공장을 장장 12시간 동안 덮쳤다. 120년 만에 내린 450㎜의 기록적 폭우였다. 공장이 물에 잠기면서 전기도 나갔다. 급기야 밤 11시경 인근 계곡에서 불어난 물과 토사가 덮쳐 벽이 무너지면서 공장은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했다. 토사를 퍼내는 데만 이틀, 공장을 다시 운영하기까진 사흘이 걸렸다.

 

코티나 주행

 

끔찍한 악몽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자동차생활이 펴낸 <국산차 계보>에 따르면, 당시 현대차가 물에 젖은 차를 판다는 소문이 돌면서 판매가 뚝 떨어졌다. 1970년 7월엔 부산에서 운행 중인 코티나 택시 218대 중 절반 가까운 100여 대가 우르르 몰려들어 환불을 요구했다. “제너레이터에 결함이 있는 데다 부품 값이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이유에서였다.

 

전시된 코티나

 

뿐만 아니라 코티나는 라디오, 히터, 서스펜션에서도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오죽하면 ‘코피나’ ‘고치나’ ‘골치나’처럼 조롱에 가까운 별명이  붙었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포드는 자체 조사단을 파견했다. 예상대로, ‘아니 땐 굴뚝에 난 연기’는 아니었다. 선진국의 잘 닦은 도로에 맞춰 설계한 차를 열악한 환경에서 영업용으로 험하게 굴리면서 생긴 문제였다.

 

중형세단 20M과 버스, 트럭도 선보여

현대차는 시작부터 종합 자동차 제조사를 꿈꿨다. 코티나를 내놓은 다음해인 1969년 5월부터는 포드의 중형세단 20M도 만들기 시작했다. 우아한 디자인에 106마력 뿜는 6기통 엔진을 얹고서 국내 최고의 자동차를 꿈꿨다. 같은 해 8월부턴 R-192 버스도 생산에 나섰다. 현대가 직접 설계한 첫 번째 자동차였다. 영국 포드의 D-750 트럭도 생산했다.

 

현대 D-750

 

1969년 한 해 동안 현대차는 코티나 5,547대, 포드 20M 756대, D-750 트럭 1,222대, R-192 버스 282대 등 총 7,807대를 찍어냈다. 그해 국내 자동차 생산대수는 승용과 상용을 통틀어 1만8,786대. 현대차는 애초 계획을 두 배 이상 달성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하지만 당시 절대 강자였던 신진자동차의 견제와 품질문제로 시련의 막이 올랐다.

 

현대 R-192

 

1971년 현대차는 뉴 코티나를 선보였다. 좌우 동그란 한 쌍의 헤드램프를 네모 낳게 다듬고 크롬 몰딩으로 멋을 냈다. 그러나 이전 코티나 때 망가진 이미지는 좀처럼 회복될 여지를 보이지 않았다. 영업사원들은 대량판매에 사활을 걸었다. 1차 석유파동 앞두고 불황이 닥치면서 할부금 회수에 제동이 걸렸다. “현대차가 부도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뉴 코티나

 

급기야 현대차는 채권회수팀을 꾸려 전국을 돌았다. 설상가상으로, 합작회사 설립을 앞두고 포드가 조건을 바꿔가며 시간을 끌었다. “현대차는 엔진만 만들라”는 요구까지 나왔다. 보고를 받은 정주영이 포드 협상단을 본사로 불렀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정주영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포드와의 관계도 거기까지였다. 이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순간이 왔다. (2부에서 계속)

글/김기범(로드테스트 편집장) 사진/현대자동차

 

참고문헌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 정세영, 행림출판

<뉴 브릴리언트 컴퍼니>, 박병재, 매일경제신문

<시발부터 쏘나타까지, 국산차 계보>, 박인해,  선우일권, 자동차생활

 

*출처:  코티나로 시작한 후발주자의 도전, 현대자동차 / Daum 자동차   https://auto.v.daum.net/v/Nl2sbf8CM9

 

코티나로 시작한 후발주자의 도전,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사옥에서 더부살이로 출발 1967년 12월 29일. 현대자동차의 공식 시작일이다. 이듬해 봄, 입사면접을 위해 현대차를 찾은 한 사회초년병은 당시 사무실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서울 무교동 현대건설 사옥 2층에 들어섰다. 직원 10여 명 사이에서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책상에 걸터앉은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가 바로, 신생기업 현대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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